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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0호
발행연도
2009.3
수록면
183 - 212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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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땅 하와이로의 한인 이민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처음으로 윤허한 집단 이민이었으며, 처음으로 주한 미국 선교사가 권장한 이민이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미국 땅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지배인이 처음으로 접한 한인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대한제국의 외무협판이 이민 현상을 시찰ㆍ보고한 대상이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외국 땅에서 기독교 교회를 세운 한인이었는데, 이것은 미국선교사가 인천에 도착한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이 논문은 이러한 역사상 처음이었던 사건의 주역인 약 7,400명의 한인 이민자들이 여러 방면의 관계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는가를 가늠하여 보았다. 이민자들에 관한 견해를 관찰한 시기는 1903년부터 1906년까지로 이민이 시작된 지 4년 동안이면서 마지막 이민자가 온지 1년 반 후까지의 기간이다. 이민 초기 4년은 아직 한인들이 미국화되지 않았고, 조선 땅을 떠날 때의 모습을 그대로 많이 간직하고 있었던 기간이라 할 수 있다. 한인 이민자들을 접하고 이들을 관찰한 사람들은 주한 미국 선교사, 대한제국 외무협판,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관리자, 하와이 감리교 감리사, 하와이의 신문 등이다. 이 논문에서 이들의 보고서, 일기, 신문기사들을 분석하였는데, 하와이 한인들에 대한 견해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랐다.
주한 미국 선교사, 특별히 이민을 권장하고 이민 모집에 도움을 준 감리교 선교사들은 이민자들의 복지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사탕수수농장 관계자들이 이민자들을 잘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였다. 주한 선교사들은 많은 이민자들이 교회에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하였다. 더구나 교인 수가 증가할 뿐만 아니라, 이들 모두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교회 자급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한다는 사실에 고마워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한 선교사들은 한인 기독교인들이 비신자와 비교하여 현저히 월등한 일꾼이라는 사실에 큰 긍지를 가졌다.
한인 노동자들의 행동거지를 우려했던 외무협판 윤치호는 농장 지배인들이 이들을 어떻게 보며 대우하는가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민자들이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에 안심하였다. 그래서 외무협판의 입장에서 하와이 이민이 한인들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였다. 한걸음 나아가 이민을 장려하는 국가 정책을 세울 것과 이민자 선발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한인 노동자들이 하와이에 온지 1년 내지 3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탕수수농장 지배인들이 그들의 노동력과 태도를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한편, 중국인과 일본인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농장 일에 익숙하였고, 농장 지배인들은 한인들을 이들과 비교하여 보게 되었다. 농장 일에 익숙하지 않은 한인들의 노동력이 열등하게 보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더구나 한인들은 한 농장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이곳저곳으로 자주 옮겨 다니는 경향이 있어 믿고 일을 맡길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인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노동자들로 평가되었지만, 그래도 33%의 지배인들은 한인 노동자들이 벌써 일을 잘하거나 하거나, 앞으로 좋은 일꾼이 될 것이라고 평하였다. 이런 흡족한 평가는 기독교인 노동자들이 성실히 또 열심히 일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와이 감리교선교부의 입장에서 볼 때, 한인이민자들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준 백성이었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선교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귀국하여 일본인 교인수가 감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 기독교인들의 하와이 유입과 또 많은 이들이 하와이에 와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여, 1905년 12월 제1차 하와이 감리교선교부 연회가 열렸을 때, 하와이의 전 감리교인 수의 64%가 한인이었다. 한인들이 하와이 전체 인구의 2%밖에 되지 않은 것과 비교할 때, 한인 감리교인의 비율은 특출한 현상이었다 한인들이 하와이 감리교의 중흥을 가져 왔고, 감리교선교부는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하와이 신문들이 한인들의 범죄사건을 기사화하였지만, 범죄와 범법은 비단 한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서양인, 일본인, 중국인, 하와이 원주민들도 범죄와 범법 기사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유독 한인들만이 신문에서 범죄자로 낙인 되지 않았다. 범법과 관련하여 한인들은 서양법과 서양의술을 모르거나, 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보편적으로 기사화되었다. 이에 하와이 감리교선교부 감리사는 “이상한” 그리고 “무지한” 한인들의 이미지를 약화시키기에 노력하였고, 하와이 주민들에게 다른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고 아량을 베풀어 주기를 호소하였다.
하와이 기독교 지도자들과 또 미주 본토와 한국에서 방문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인들을 긍정적으로 보고 받아들인 사실은 하와이 신문들이 한인 기독교인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게 만들었다. 신문들은 한인 교회 건축에 관한 기사뿐 아니라, 방문하는 선교사들이 한인 기독교인들을 칭찬하는 글을 기사화하였다.
미국 선교사들이 하와이 한인들의 민족성, 신앙심 그리고 교회활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홍보한 현상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관련하여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사실이다. 미국 종교 지도자들에 더하여, 대한제국의 외무협판 윤치호, 그리고 7,000여 하와이 한인을 대표한 윤병구 등은 하와이 한인들이 성실한 노동자일 뿐만 아니라,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기여하였다.
결론적으로,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에 관한 견해는 긍정적이었으며, 이 긍정적 견해는 기독교인들이 기여한 것이다. 하와이 이민에 관여하였고, 관심을 가져온 선교사들도 이러한 긍정적 견해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목차

1. 이민 경위
2. 하와이를 방문한 주한 미국 선교사들의 견해
3. 외무협판 윤치호의 견해
4. 사탕수수농장 지배인의 견해
5. 하와이 감리교선교부 감리사의 견해
6. 하와이 신문에 나타난 견해
7.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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