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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현강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5호
발행연도
2011.9
수록면
47 - 7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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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해방 이전 전북 지역 의료선교의 양대 축이었던 군산예수병원과 전부예수병원의 역사를 살펴본 것이다.
남장로교의 의료선교는 군산에서 드루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곧 그가 용하다는 소문이 전라도뿐만 아니라 금강 건너 충청도의 하안 마을들에도 확산되었다. 그곳의 주민들은 이렇게 의료선교사와 병원을 통해 기독교 또는 근대문명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알렉산더의 후임으로 1904년 군산에 온 다니엘은 진료소 수준의 의료 시설을 병원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그래서 1908 년에는 군산예수병원의 진료 횟수가 1만 번을 넘어서게 되었다. 다니엘에 의해 기초가 잡힌 군산병원은 그 후임자인 패터슨의 시대에 절정을 맞이했다. 패터슨은 병원의 외형을 확장시키는 한편 진정성을 갖고 환자들을 대하여 군산예수병원의 성가를 한껏 드높였다. 그의 뒤를 이은 브랜드와 홀리스터의 시대 군산예수병원은 대외적인 선교 환경의 변화와 선교사들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병원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그 40년 동안 군산예수병원은 모두 7만 여 명의 환자들을 진료한 것으로 집계된다.
전주스테이션의 의료사업은 잉골드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잉골드는 여성의 몸으로 당시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와 부딪히며 의료 사역의 큰 진전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10여 년동안 인내하며 전주예수병원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전주 의료사역 중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포사이드는 그 후 목포로 전임해서 남장로교 한센병 구호사업의 계기를 만들게 된다. 전주예수병원의 제4대 의료선교사였던 다니엘은 전임지였던 군산에서 했던 것처럼 병원 건물을 신축하여 전주의 의료사역을 제 궤도에 올려놓았다. 다니엘은 1915년 세브란스로 갈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재임하였다. 그의 후임인 로버트슨은 병원 행정 선진화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전주예수병원은 보그스 재임 시절 한층 발전할 수 있었다. 보그스는 병원의 중흥을 이룩한 장본인이다. 군산에 패터슨이 있었다면 전주에는 보그스가 있었다. 그는 불의의 화재 사건을 오히려 병원 발전의 전기로 삼았다. 시설 확충과 안정적인 리더쉽을 바탕으로 전주예수병원은 1930년대 후반 진료 횟수 면에서 두 배 가량 성장하며 해방 이후를 준비하게 되었다.

목차

1. 머리말
2. 한말 전북지역 의료선교의 시작
3. 일제강점기 전반 전북지역 의료선교
4. 일제강점기 후반 전북지역 의료선교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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