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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전인수 (그리스도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9호
발행연도
2013.9
수록면
69 - 96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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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고는 최태용의 조선교회 인식이 조선적 기독교로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곧 최태용의 조선교회 인식과 조선적 기독교 운동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지를 사상적으로 재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태용은 1920년대 조선교회의 근본문제를 신앙의 부재에서 찾았다. 그는 신앙과 신조, 신앙과 교회를 구분하면서 조선교회가 신앙의 생명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제도, 조직화된 교회에 신앙의 이름으로 반발하면서 내적으로 살아있는 기독교를 추구했고, 신조를 믿는 ‘믿음’과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인 ‘신앙’을 구분함으로써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했다. 그는 이를 ‘신앙혁명’이라고 불렀다.
한국신학이라고 평가되는 ‘영적 기독교’론은 이러한 신앙혁명을 신학적으로 이론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태용은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는 과정 중에 예수께서 이 땅에서는 완전한 육이었다는 ‘순육론’을 주장하고, 조선교회가 성서를 숭배하는 성서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하게 된다. 이는 조선교회의 보편적인 기독론이나 성서관과는 배치되는 주장으로서, 그는 이 때문에 이단으로까지 비판받게 되었다.
최태용은 서구교회로부터의 정치적, 경제적, 신앙적인 독립을 추구하였다. 그는 조선교회가 서구교회와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하고, 서양인의 근본주의적 신앙의 한계를 극복하는 ‘영의 기독교’를 산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1935년 복음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최태용은 일제에 대해서는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전도의 사명을 받은 1916년 이후 정치적 민족주의를 단념함으로써, 일제말 친일적인 글을 쓰게 되는 사상적 단초를 제공한다.
복음교회는 최태용의 조선교회 인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결과물이었다. 즉 신앙의 생명성을 담보하되, 서구교회와 선교사로부터는 독립된 교회의 추구가 복음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최태용은 조선인의 창출신학을 주장했지만, 기독교를 조선의 종교전통과 재래문화 안에서 토착화하는 데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또한 복음교회 설립 이후 최태용의 신학은 제도교회를 더욱 옹호하고, 극단적인 성서관도 완화되며, 순육론은 포기하게 되는 등 전체적으로 보수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복음교회가 빠르게 기성교회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신앙생명’의 회복
Ⅲ. 서구 교회에 대한 주체성 회복
Ⅳ. 신앙중심으로 민족문제의 상대화
Ⅴ. 조선인 자신의 교회 설립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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