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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세운 (국립고궁박물관)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81號
발행연도
2014.3
수록면
5 - 28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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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79호인 구황동 금제여래좌상은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傳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 하나로 12.2㎝의 작은 크기에 광배와 대좌는 금동으로, 불신은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함께 발견된 사리함 명문에 의하면, 구황동 삼층석탑은 692년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되었고, 706년 성덕왕이 불사리 4과, 〈순금아미타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추가로 봉안했던 통일신라 왕실발원 석탑이다. 그러나 순금아미타상 1구를 봉안하였다고 기록과는 달리, 석탑 안에서는 실제로 좌상과 입상 2구의 금제여래상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두 상이 결한 수인이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 없어 두 상 중 어느 상이 아미타상인지 밝히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본 논고는 먼저 금제여래좌상이 명문에 기록된 아미타상임을 검증하기 위해 여래좌상과 동일한 수인을 결한 唐代의 불상 중 명문이 있는 상을 정리하였다. 그 결과 총 21구의 불좌상을 확인하였고, 그 중 15구가 아미타상이라는 명문이 있었으며, 7세기 중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 중국 중원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유행한 아미타수인의 하나였음이 밝혀졌다. 이로써 금제여래좌상은 당의 새로운 아미타도상을 빠르게 수용하여 제작한 아미타불이라는 것이 검증되었고 특히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된 당대 아미타상의 예는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덕왕이 조성한 아미타상과 그 성격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에서 여래좌상을 706년 구황동 석탑에 안치한 금제아미타상으로 볼 수 있는 보다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였다.
두 번째로는 금제여래좌상의 광배와 대좌의 구조와 문양, 불상의 형식과 양식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비교ㆍ분석하였다. 특히 불신은 극히 드문 순금으로 제작되었고, 광배는 투각, 선각, 타출, 인화 기법 등 당시 유행했던 다양한 금속공예기법들이 총망라되었다. 또한 양감이 풍부하며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얼굴의 표현과 사실성과 생동감 넘치는 손의 표현, 그리고 자연스럽게 늘어진 옷자락의 부피감과 질감의 강조는 비교되는 사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이처럼 700년대 초 신라왕실에서 성덕왕이 직접 발원하고 신라왕실 최고의 장인이 순금으로 제작한 금제여래좌상은 당시 신라의 발달된 제작기법의 바탕 위에 당에서 새롭게 유행한 아미타수인을 결합한 최신의 금제아미타불상이다. 이는 통일신라 초기 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그 문화의 수용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예이자, 통일신라 700년 전후 신라 왕실의 조각과 공예의 우수성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와 명문
Ⅲ. 금제여래좌상의 형식과 양식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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