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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인천학연구 인천학연구 제25권
발행연도
2016.8
수록면
121 - 163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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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재인천일본인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에 대한 인물연구다. 고타니는 1889년 4살 무렵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인천에 건너와 살다가 일제 패망 후 일본으로 철수해간 식민1세이다. 그는 고베(神戶) 출신으로, 개항 초기 가족 단위로 이주해온 드문 경우에 속한다. 미장이 신분의 고타니 토메요시가 부친으로 추정되는바, 일본의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고타니의 본격적인 사회 진출은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 신자로서 인천 일본 기독교청년회를 통해서였다. 그는 1926년경 기독교청년회 주사로서 당시 새로이 등장한 ‘사회사업’을 결합한 다양한 활동으로 사회에 알려졌다. 그 후 1931년 6월 『인천부사』 편찬자로 위촉되어, 실질적으로 편찬을 주도함으로써 다른 지역들에 비해 빠른 기간 내에 완성했다.
이후 고타니는 인천제2공립보통학교와 인천중학교 설립에 큰돈을 기부함으로써 일본천황의 감수포장을 수여하는 등 인천 사회의 유력자로 부상했다. 1935년 5월 인천부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 그의 직업은 대가업자(貸家業者)였다. 1937년 전시체제기에는 정회(町會)의 총대 및 보호관찰소의 촉탁보호사를 겸직했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후에는 인천부회 부의장으로서 재인천일본인의 철수작업을 이끌었고, 그 과정을 『인천 인양(철수)지』로 남겼다.
고타니는 스스로 “조선의 풍토와 자연이 키워준 인천아(仁川兒)”라고 칭했다. 미장이 집안의 하층계급 출신이 식민지 이주 40년 만에 인천 사회의 유력자가 됨으로써 인생역전의 기회를 얻었으니 그럴 만하다. 그러나 그가 4살 때부터 57년간 살았던, 그래서 꿈에도 그리운 땅 仁川은 인천이 아니라 진센(Jinsen)이었으니, 기실 그는 인천아가 아니라 진센코(Jinsenko)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개항과 고타니의 조선 이주
Ⅲ. 고타니의 사회 진출과 인천부사 편찬
Ⅳ. 인천의 주요인사로 부상
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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