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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해현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83집
발행연도
2016.9
수록면
335 - 375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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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 불교 발전에 영향을 준 백제계 도래인 승려 행기의 사상 형성에 백제계로서의 정체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大僧正舍利甁記’의 ‘王爾의 후예’라는 구절과 俗姓 ‘高志’씨의 분석, 행기 고향에 왕인의 후예들이 많이 살았다는 점을 통해 왕인 후예임이 확인된 行基는, 모계 또한 백제계 도래인으로서 ‘백제인’ 의식이 일찍 형성되어 있었다.
行基는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王仁 씨족, 백제계 도래인 출신 僧 道昭와의 만남, 천무천황의 숭불 정책 등의 영향을 받아 출가하였다. 그의 사상 토대는 수행과 더불어 ‘유가론’과 ‘유식론’을 공부하며 중생 구제 사상을 실천한 스승 道昭의 가르침이었다. 그의 福田사상은 백제계 도래인에 대한 연민, 평성경 천도 공역으로 지친 민중 구제 활동등 당시 시대적 상황 등이 결합되어 스승 도소보다 훨씬 실천적이었다.
행기가 도래인이 포함된 호족 세력의 도움으로 많은 구제 시설을 만들어 ‘행기보살’로 추앙되는 등 구심점이 되자, 강한 정부를 건설하였던 藤原不比等은 717년 승니령을 내려 行基를 억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行基 세력을 제어할 수 없자 722년에 재차 그의 활동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자 결국 731년 行基 활동을 공인하게 되었다. 行基 불교의 특징이 평성경에서 사용된 軒瓦 양식이 대야사 토탑에서 사용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율령정부와 맞서려하지 않고, 중생 구제 활동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大佛을 造像하려 한 성무천황은 도래인들의 구심점인 행기를 대승정에 임명하여 도래인들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결국, 행기 불교 사상은 백제계라는 정체성, 백제계 도래인 스승 도소의 영향, 백제계 도래인 · 유민들에 대한 연민 등이 결합되어 형성되었기 때문에 백제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한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왕인의 후예, 行基
III. 行基의 出家와 福田思想
IV. 중생 구제 활동과 율령정부
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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