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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강식 (한국해양대학교)
저널정보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족문화 한국민족문화 제67호
발행연도
2018.5
수록면
3 - 41 (39page)
DOI
10.15299/jk.2018.05.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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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극복은 많은 인물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선정된 宣武原從功臣 9,060여 명의 명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던 그들의 업적이 제대로 알려져 있는 사례는 아직까지 제한적이다. 임진왜란 때 밀양 출신으로 울산을 중심으로 많은 전공을 세운 襄武公 金太虛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시기에 양무공 김태허의 활동은 밀양에서의 창의 이후, 울산 지역 관군의 장으로서 전투 참전과 지휘, 적정의 정탐 활동과 정보 수집과 보고, 군수 지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울산군은 임진왜란 이후 울산부로 승격되는데, 그 중심에는 울산군수 김태허의 활약이 있었다. 임진왜란 중 대부분의 시기에 일본군은 동남해안에 쌓은 倭城에 주둔하여 근거를 마련하고서 인근 지역을 약탈하면서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군도 일본군에 대한 상시적인 대비를 통해서 방어를 해야만 했다. 때문에 울산 지역은 임진왜란 전 시기에 걸쳐서 최전선이었다. 당시 울산에서는 김태허가 울산 군수로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관군과 의병을 통괄하면서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양무공 김태허가 임진왜란 시기에 세운 전공은 전쟁 전후에 관직의 제수, 포상과 현창의 과정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것은 전공에 대한 여러 차례의 陞差, 功臣의 선정, 祠宇의 건립, 諡號의 하사로 이어졌다. 이런 조치들을 통해서 양무공 김태허는 전쟁 이후에 지역사회에서도 鄕案에 入錄되었으며, 읍지의 인물조와 충렬조에 기재되면서 공적으로 인정되고 기억되어 나갔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임진왜란 개전기의 활동
3. 강화교섭기의 활동
4. 정유재란기의 활동
5. 임진왜란기 활동의 평가
6.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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