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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과학원 개념과 소통 개념과 소통 제17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5 - 3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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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있었고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쇼군(將軍)에게 여러 차례 통신사를 파견했다. 일본측도 이 대규모 사절단을 정중히 대접했다. 이러한 관계는 흔히 선린(善隣)과 우호(友好)로 표현된다. 당시 양국에서 사용된 말을 빌려 ‘성신(誠信)’ 외교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 그러한 관계는 일변했다. 왜 그랬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부터 이미 양국은 통신사의 파견과 수용에 열의를 잃고 있었다는 사실에 착목해야 한다.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통신사의 파견은 유학적인 예(禮)의 실천은 아니었다. 맹자가 말하는 ‘교린(交隣)’이란 대등한 나라 사이의 교제를 ‘예’로 규정한 것이 아니었다. 통신사의 파견과 수용은 양국의 권력정치(power politics)적 배려에서 비롯된타협적인 정책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무역과 교제를 평온하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pacta sunt servanda(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국제법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승인해야 했는데, 이를 바로 ‘성신’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 사절단은 성신을 내세우는 반면에 일본인을 ‘이적(夷狄)’으로 경멸했다. 그러한 인식은 일본의 실제 생활을 보아도 수정되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의 힘(power)을 경시하는 경향도 강해졌다. 한편 일본 측도 조선의 그러한 인식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노가 축적되었다. 유학의 보급에 있어서는 열등하더라도 그외의 점에서는 일본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려는 충동도 강해졌다. 이렇게해서 양국 모두 상대방에 대한 인식 때문에 통신사를 파견하거나 정중히 받아들이는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존왕론’의 앙양(昻揚)과 ‘세습’제도에 대한 분만(憤懣)이 메이지유신과 결부되면서 결국 그간의 양국 관계는 완전히 전복되고 말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 가지 동향은 통신사가 일찍부터 눈치채고 변화의 가능성을 예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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