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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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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남도문화연구 남도문화연구 제35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71 - 196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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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공론정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숙종대 이후 당론이 격화되면서, 공론은 당론 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특히 국왕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환국 이후로 는 공론의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이 국왕에게 있었다. 이 때문에 국왕이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공론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영남남인들이 사도세자와 관련해 올렸던 두 차례의 만인소였다. 1792년 사도세자의 신원을 요구하며 올렸던 첫 번째 영남만인소는 정조로부터 매우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정조는 사도세자 신원이라는 숙원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우익 을 양성하고자 했고, 영남 남인이 그 대상이었다. 정조는 무신란과 대다수 영남 남인이 무관하다는 점을 천명함으로써 영남 남인이 역적으로 지목되었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와 같은 정조의 조치에 영남 남인은 1792년 류성한, 윤구종 사건을 기회로 사도세자 의 신원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리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이는 영남 남인이 자신들의 명분을 임오의리에 두는 것이며, 이를 통해 중앙 정계에 복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조 역시 영남 남인들의 만인소를 계기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분위기는 일변하였다. 순조 즉위 이후 집권한 벽파는 임오의리와 관련된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영남 남인의 중앙 정계 복귀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영남 남인은 중앙 정계에 복귀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사도세자 탄생 2주갑을 기화로 다시 한 번 복귀를 꾀하였다. 그것은 사도세자와 정조의 휘호를 추가로 올리는 문제를 계기로, 사도세자를 추존하자는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임오의리의 제기를 통해 자신들의 명분과 입지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 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임오의리나 신임의리와 같은 정조대의 정치논리는 더 이상 중요 한 명분이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남 남인 내부에서도 만인소의 효용성에 회의적인 이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논의에서 상소 봉입까지 15일밖에 걸리지 않았던 1792년과 달리, 이때에는 거의 4개월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영남 남인의 의도나 목적 은 국왕이나 집권 세력의 정치적 의도나 목적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결국 사도세자 2주갑을 맞이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던 영남 남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조정 대신들의 강력한 반발과 처벌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하는 것을 피하 고자 했던 철종의 무마로 무거운 처벌은 피하였다. 영남남인은 임오의리 제기를 통해 정치적으로 재기할 가능성이 적어도 철종대에는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만인소가 아무런 효과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계에서는 별다른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지만, 향촌사회에서 영남남인의 결속력이나 위상을 강화하는 데는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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