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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19권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31 - 176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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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경상도 성주의 1883년 농민항쟁과 1894년의 농민전쟁을 중심으로 19세기말 농민운동의 발전과정을 연구하였다. 1883년의 농민항쟁은 1862년의 농민항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농민층의 개혁운동이었다. 1862년에 발생한 성주의 농민항쟁은 개별 분산적이던 농민들의 부세저항이 집단적인 부세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고, 또한 소·빈농층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혁명적인 운동방식으로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들의 항쟁은 대원군 정권이 부세제도를 개혁하고 서원철폐를 단행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지방통치를 책임진 수령과 향리, 관속 그리고 관권과 결탁해 특혜를 누렸던 토호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이들의 공세는 대원군 실각 이후 강화되어 갔고, 그로 말미암아 지배층과 소·빈농층의 대립 또한 격화되어 갔다. 그 대립은 마침내 1883년 소·빈농층의 또 한 번의 농민봉기를 불러왔다. 1883년의 농민항쟁은 부세제도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던 향리에 대한 통제를 둘러싸고 발생하였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신뢰을 받는 인물로 지방 관속 전체를 통솔하는 이방과 부세업무를 관장하는 향리를 임명할 것을 요구하며 항쟁을 일으켰다. 이 항쟁은 그 요구가 부세제도의 개혁을 넘어 그 운영까지도 개혁하려 했다는 점에서 1862년의 농민항쟁보다 진일보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항쟁은 감영군이 농민항쟁을 무력 진압하면서 실패하였고, 농민항쟁 지도층은 처형되거나 유배형을 받았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동학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개혁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성주에서 동학이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1880년대 후반부터였다. 성주의 동학군은 1894년 8월 하순 상주, 김산의 동학세력의 지원을 받아 개혁활동을 시작하였다. 동학군의 개혁활동은 두 갈래로 펼쳐졌다. 하나는 조세제도개혁이었고, 다른 하나는 부정한 향리와 토호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이 개혁으로 피해를 입은 향리와 토호들은 독자적으로 군대를 결성해 동학군을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이에 맞서 성주, 김산, 상주의 동학군은 대규모 연합군를 편성해 성주를 점령하고 향리들에게 보복하였다. 동학연합군은 경상감영의 요청으로 일본군이 출동하자 전투를 벌이기에 유리한 김산, 상주로 이동하였고, 이로써 성주의 동학농민전쟁은 끝이 났다. 성주의 동학농민전쟁은 전국적인 농민전쟁의 한 부분으로 전개되었고, 그 개혁의 성격이나 농민조직에서 이전의 농민항쟁의 부분성과 분산성을 극복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스스로를 반봉건 반침략운동의 주체로 결집시켜갔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진압되었고, 뒤이은 지배세력의 보복으로 1862년 농민항쟁 이후 성장해 왔던 소빈농층의 개혁운동은 재기불능 상태로 파괴되고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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