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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정준 (서울시립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95호
발행연도
2019.9
수록면
33 - 74 (42page)
DOI
10.37331/JKAH.2019.09.9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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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5세기 초반 고구려의 통치 이념과 國際秩序 인식을 검토하였다. 크게 두 가지 점에 주목하였는데, 첫째, 고구려가 5세기 초반에 요동과 한반도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한 뒤 이를 근거로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구상했다면, 이는 단순히 고구려 왕족과 지배층뿐만 아니라, 새롭게 편입된 韓·穢人과 夫餘人, 그리고 漢人을 포함한 영토 내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했을 것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표방했던 통치 이데올로기는 數世紀 동안 존재했던 전통적인 통치자(통치기구)의 歷史像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었고, 이는 한반도와 요동 일대의 주변 세력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국제질서인식을 표방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둘째, 400년경 고구려가 확보했던 요동과 한반도 일대는 기존에 邊郡 통치기구들의 정치 · 경제 · 문화적 영향력이 강하게 미쳤던 곳이었다. 이 통치기구들은 전통적으로 군현 주민에 대한 지배권뿐만 아니라, 주변 東夷 諸勢力을 대상으로 朝貢과 官號 · 印綬 · 衣幘의 賜與 등으로 상징되는 관할권을 지녔다. 이러한 통치기구들의 역사적 위상과 상징성은 요동과 한반도의 주민들, 그리고 東夷 諸勢力들에 의해서도 뚜렷하게 인지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서기 400년 이후 요동의 새로운 대표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던 고구려의 대외인식과 전략에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본고에서는 먼저 ‘요동’의 공간 범위 형성과 그 지역에 설치된 통치기구들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특히 후한말 이후 公孫氏 등 독자세력이 요동과 한반도에 걸친 지역에 웅거하면서 전통적인 통치기구의 권위와 상징성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주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비」문의 영락 5년조에서 고구려가 요동을 巡狩했다는 기사는 실상보다 과장된 내용으로서 고구려가 옛 邊郡 통치기구의 전통적인 권위를 대체했음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했다는 점, 그리고 辛卯年條 전후의 문장과 永樂 8년조의 군사 활동이 갖는 역사적 명분 역시 요동 확보를 근거로 한 역사적 권위를 토대로 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밝히고자 했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遼東’의 역사적 위상 변화와 고구려
III. 「廣開土王碑」文의 국제질서인식과 ‘遼東’
I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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