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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진정환 (국립제주박물관)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51호
발행연도
2021.4
수록면
47 - 75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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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고는 후백제 주도 세력의 변화가 후백제의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 변화에도 폭넓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가설 아래 견훤 세력의 성립과 확장, 분열과 교체의 관점에서 후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본 것이다.
세력 변화는 총 여섯 차례 이루어졌는데, 1기는 889~892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 신라 西南海 防戍軍의 비장이었던 견훤은 신라 內地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방수군과 해상을 무대로 활동하던 전남 동부지역의 在地勢力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다. 2기는 892~900년으로 自王한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견훤은 왕을 자처하였으나 나라의 국체를 만들지 못하였다. 이는 신라 내지 출신과 재지세력 간 주도권 쟁탈 때문으로 여겨진다. 3기는 900~901년 전후 시기다. 900년 ‘전주 선언’에서 견훤은 통치이념으로 ‘百濟 繼承’과 함께 ‘馬韓-百濟 一體意識’을 제시한다. 이는 재지세력이 후백제 주도권을 쥐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901년 군사 행동이 실패하면서 후백제 내 주도권은 신라 내지 출신으로 넘어간다. 4기는 901년 이후부터 920년 이전 시기이다. 이 시기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신라 내지 출신은 경북 북부지역 공략에 공을 들인다. 이때 경북 북부지역 주민과 함께 문화가 후백제지역에 유입된다. 5기는 대야성을 함락한 920년부터 927년 사이의 시기이다. 920년 대야성 함락은 후백제 건국의 당위성과 정체성을 확인하고 견훤이 정통성을 얻은 일대 사건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재지세력들은 백제의 개국지로 인식하였던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미륵사 개탑” 등 백제 현창사업이 펼쳐졌다. 6기는 경주를 침공한 927년 이후 시기이다. 927년 경주 침공 성공 이후 견훤은 백제의 계승자에서 후삼국의 맹주로 그 지위를 스스로 격상시켰다. 이때부터 재지세력은 권력에서 밀려났으며, 결국 후 백제는 멸망하였다.
특히, 이 논고는 성격이 다른 후백제 주축 세력의 변화가 예배의 대상이면서도 정치적 상징물로도 조성되었던 불교미술품의 형식과 양식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초기 견훤 세력 형성
Ⅲ. 전주 천도와 세력 확장
Ⅳ. 주도 세력 교체와 정체성 변화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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