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천수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상고사학회 한국상고사학보 한국상고사학보 제98권 제98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95 - 125 (31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고에서는 고고학적인 방법으로 동아세아 왕릉의 역사적 의미와 배경에 대하여 접근하였다. 광범위한 동아세아 왕릉 가운데 필자가 직접 현지 조사를 실시한 중국의 北魏, 한국의 加耶, 新羅, 일본의 倭 왕릉을 대상으로 하였다. 유목민족으로 거대한 왕릉을 축조하지 않았던 北魏가 5세기 말 돌연 거대한 능역과 분구를 가진 왕릉이 축조한 것은 漢化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당시 거대한 왕릉을 조영한 南朝와 고구려, 나아가유목민족으로 거대 왕릉을 조영하지 않던 柔然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북위는 왕릉을 內 政과 外交에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금관가야는 4세기 왕릉의 파괴 현상이 보이는 점에서 왕통이 교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5세기 이후 대형분인 왕릉이 축조되지 않은 것에서 국력의 쇠퇴와 왕통의 교체를 추정 할 수 있다. 아라가야는 왕릉의 조영과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령군 지산동고분군과 같이 5세기 후엽 이후왕릉급 고총이 一系에 한정된 것과는 달리 왕권이 특정 수장계열에 고정되지 않고 왕릉에필적하는 왕족묘가 6세기에도 존재하는 점에서 왕권의 한계를 추정할 수 있다. 대가야는 5세기 말 이래 지산동고분군의 조영원리가 6세기 신라와 백제의 왕릉과 유사한점에서 대가야가 백제, 신라와 같은 사회발전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대가야는 왕묘의 축조 과정이 삼국의 왕릉과 유사하고 호남동부지역에 걸친 영역과 독자적인문명으로 볼 때 백제, 신라와 같은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가 5세기 초에 이르러 계획적으로 거대한 능원을 축조한 것은 내물왕이래의 왕권의확립, 세습왕권의 형성과 관련이 있으며, 외적으로는 동시기 거대 능원을 축조한 고구려, 백제와 함께 倭를 의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倭는 3세기 중엽 奈良분지에서 276m의 초대형 전방후원분인 왕릉이 출현하며 이후 일본열도 전역에 걸쳐서 전방후원분이 축조된다. 그런데 3-5세기 왕릉에는 奈良분지 내에서 同시기 같은 규모의 왕릉이 竝立하는 것에서「聖 俗 二重王制」에 의한 2인의 왕이 병립했다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더욱이 倭의 왕릉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奈良분지의 佐紀고분군에서 이동하여 大 阪평야의 古市, 百舌鳥고분군에 조영되며, 5세기 전반에는, 古市고분군과 百舌鳥고분군 사이에 교대로 조영된다. 이는 왕권이 竝立적이며 세습이 불안정한 양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상 동아세아의 왕릉의 성립과 발달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각 국은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에 처해있었음에도 거대 왕릉의 성립이라는 공통된 과정을 보이는데, 이것에서 각국이 처한 환경은 다르지만 왕권의 확립과 성장이라는 공통된 사회발전과 관련하여 왕릉이출현함을 알 수 있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8)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