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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주희 (중원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65집
발행연도
2019.8
수록면
49 - 79 (31page)
DOI
10.18496/kjhr.2019.08.6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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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년 藤原不比等은 文武天皇의 擁立에 공을 인정받고, 정치무대에 전면 등장하였다. 그해 문무천황은 不比等의 딸 藤原宮子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698년 천황의 명령으로 不比等과 그의 자식들만 藤原氏 사용이 허용되었다. 藤原氏=不比等家門이 성립한 그해(698년) 12월 대마도에 금광개발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까지 일본에서는 금이 생산되지 않았고, 한반도와의 교역을 통해 들여오고 있었다. 신라는 내물마립간 시기부터 확보된 金을 바탕으로 대외교역을 시작하였으며, 그 생산량이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33대 聖德王대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신라의 금 생산능력이 수준급 이상으로 상승하다가 절정에 이른 시기는 일본에서 藤原不比等이 권력자가 되어 국가를 이끌어가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신라의 막대한 금 생산은 일본인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대마도에서 금 채굴을 시도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금광개발에 성공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25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701년 정월 대마도 금광발굴 책임자인 大伴宿祢御行이 사망했다. 부정을 막을 수 있는 빗장이 사라진 가운데 3월 금광개발이 성공했다는 好材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사실 대마도에서 바친 금은 그곳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었다. 대마도 금광개발 실무자인 三田首五瀬의 금광개발 조작 공작이 발각되었다. 발각된 시기에 대한 기록도 그들에 대한 처벌에 대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황금빛은 즉위한 문무천황을 미화시켜주었고, 사람들이 그 권력에 스스로 동의하게 하는 권위를 부여했을 것이다. 상서로운 黃金에 의거하여 연호를 大宝 元年이라 정했다. 문무천황의 장인이기도 한 藤原不比等에게 대마도 금광의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금이 대마도 産이 아니라 신라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동안 이루어낸 결실들을 거두어들이는 바로 그 타이밍에 금광발굴의 好材가 터져주는 것이었다. 대안도 있었다. 금을 가지고 일본으로 입국하는 신라의 사절단이 대마도를 경유했다.
不比等은 신라 國喪(709년)에 정을 베풀었다. 신라사절 金信福 등을 불러 향후 신라와의 더욱 활발하고 지속적인 교류를 원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신라와의 교류가 그의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었다.
대마도 금광개발은 일본인들이 신라에서 황금이 산출되는 것을 부러워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일본의 대외인식(신라=번국)을 현실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그것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藤原不比等은 이를 엄폐하고 자신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金初出을 허위조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신라金 수입대체를 위한 일본의 금광개발
3. 金初出 선전과 신라와의 교역
4. 金생산 好材의 정치성과 藤原不比等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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