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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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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19권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11 - 24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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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 식민주의 역사학의 기원을 탐사할 목적으로,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군사조사 활동이 식민주의역사학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선사관’과 맺는 관계를 추적한 것이다. 1871년 이후 일본 육군의 참모조직은 서구화되고 있었는데, 1875년 이후 공사관부 무관제가 확립되고 뒤이어 조선과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에 대한 군사조사 활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1878년에는 참모본부가 설치됨으로써 이른바 통수권이 독립되었고, 일본의 내각은 군대의 통솔로부터 소외되었으며 군대가 전쟁으로 독주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특히 1882년은 조선이 일본육군의 정복대상으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 군사밀정체제가 정비되었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전환의 해’로 기록되었다. 1882년 이후 조선에 파견된 정탐장교들을 중심으로 조선 內地 정탐활동이 추진되었다. 󰡔조선지지략󰡕은 그 동안에 축적된 정탐활동과 조선의 전통적인 역사지리서를 이용하여 작성한 것으로서, 지형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군사적 성격이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1890년대 후반 육지측량부는 지형도 곧 ‘軍用秘圖’를 제작할 수 있었다. 참모본부의 정탐이었던 사코 카게노부가 광개토왕비문 탁본을 갖고 일본으로 돌아간 것은 1884년이었는데, 그 직후부터 비문 연구가 군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 시기의 비문연구는 이전의 침략적인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를 계승한 것이었으며, 참모본부의 대륙정책과 깊은 관련을 가진 것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륙정책은 北守南進論으로 변경되었으나, 의화단 사건 이후 다시 北進論으로 바뀌었다. 이를 계기로 滿韓交換論이나 한반도 분할론 역시 물러나고 滿韓一體論이 득세하게 되었다. 만한일체론은 조선이라는 이익선을 주권선 안으로 편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러일개전론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만선사관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된 것은 대륙국가로 발전해가려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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