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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병한 (국가보훈처)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9집
발행연도
2020.2
수록면
77 - 118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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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서간도에서 조선인 친일단체였던 안동조선인회와 만주보민회의 활동과 동향을 설명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서간도는 간도와 함께 이주 조선인들의 주요 거주지로 이주조선인 대부분은 빈농이었다. 하지만 서간도는 하류지역과 달리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독립운동 세력의 영향력이 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압록강 하류지역과 중상류지역에 속하는 서간도에서 조선인 친일단체의 활동과 성격에는 차이가 있었다.
3·1운동 이전까지 서간도의 대표적 친일단체는 안동조선인조합이었다. 안동조선인조합은 1913년 설립된 이후 안동에 본부를 두고 압록강 하류는 물론 압록강 중상류까지 지부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독립단의 집중적인 공격과 일부 간부들의 독립단에 참여하는 등의 상황이 이어졌다. 그 결과 사실상 안동조선인조합은 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안동조선인조합을 해산하고 이를 만주보민회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인들의 반발을 우려하는 안동영사의 반대와 만주보민회 견제의 필요에 따라 안동영사관 관할구역에 보민회 지회를 설립하고 1921년 안동조선인조합의 명칭을 안동조선인회로 개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시 말해 3·1운동 이후 서간도에는 안동조선인회와 만주보민회라는 성격이 같은 두 개의 친일단체가 양립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만주보민회는 조직이 계속 확대되어 회원수가 5만에 이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1924년 일본은 만주보민회 해산을 결정하고 일본은 다시 1924년 장백·집안·임강·관전현의 안동조선인회 지부장을 임명하였다. 하지만 지부장을 포함한 안동조선인조합 간부들 대부분은 이전 안동조선인조합이나 만주보민회 관련 인물들이었다. 일본은 안동조선인회의 활동을 독려하기 위하여 지부장을 비롯한 안동조선인회 간부들에게 하류지역보다 더 많은 보조금과 급료를 지급하였다.
그러나 하류지역에서 한인들의 부업 장려나 취업 알선 등 비교적 다양한 안동조선인회의 활동과 달리 서간도에서는 교육과 의료지원 이외에 안동조선인회의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1930년대까지 일본의 영향력 아래 하류지역에서는 안정된 활동이 가능하였던 반면 서간도에서 독립단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안동조선인회는 활동이 미미했다.
반면 친일 조선인들의 활동은 보다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양상을 보였다. 1924년 이후 안동조선인회 지부장 등으로 임명된 이들은 안동조선인조합 시기부터 친일활동을 하였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자신의 신변은 물론 가족까지 살해당하는 등의 상황에서도 친일활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안동조선인회 간부들의 친일 성향이 안동조선인회 활동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지원과 영향력 아래에서만 생존이 가능하였던 서간도 친일단체들의 한계이자 특징이라 할 것이다.

목차

1. 머리말
2. 서간도 이주 조선인들의 사회경제적 상황
3. 안동조선인회 성립과 변화
4. 만주보민회 설립과 해산
5. 안동조선인회 재건과 활동
6.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참고문헌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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