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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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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윤미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5집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47 - 82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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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一波 嚴恒燮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동안 김구의 최측근이라는 역할만 강조된 측면이 있어, 그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그리고 정당에서의 활약을 포함한 독립운동 전반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독립운동사 속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엄항섭의 역할에 대한 의미를 확인하고자 한다.
엄항섭은 1919년 임시정부 법무부 참사를 시작으로 임시정부 국무원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임시의정원에서 新到의원 자격심사위원을 맡아 새로 선출된 의원들의 자격을 검토하여 통과여부를 결정하였고, 상임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아 임시정부 재정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였다. 1930년대부터는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뒷받침하는 정당에 속해 선전업무를 담당하였다. 한국국민당에서는 기관지 『韓民』의 편집과 발행을 맡아 당의 활동을 선전하였고, 한국독립군특무대의 총감독으로 학생들의 훈련과 중국군관학교 입학교섭을 지원하였다. 이후 한국독립군특무대의 활동이 침체되자 한국국민당의 전위단체인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조직하여 그 활동을 이어나갔다. 재건 한국독립당에서는 한국광복군과 미군의 연합작전 시행을 지원함으로써 독립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독립 후 승전국의 위치를 점하고자 했다. 1940년대부터는 임시정부 국무원에서의 활동이 집중된다. 엄항섭은 1944년 선전부장에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선전업무를 책임졌다. 1940년대는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던 때로 외국어에 능통하고 남다른 정보력을 가진 엄항섭의 역량이 발휘되었다. 그의 선전 활동은 주로 對중국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주체성을 잃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엄항섭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선발대로 환국하였다. 이후 통일국가수립을 주장하며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에 희생되면서 통일국가수립의 구호는 남한 정부에서도, 한국독립당 내에서도 배척되었고 엄항섭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약화 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로 남쪽에 가족을 남긴 채 납북되어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목차

1. 머리말
2. 상해청년동맹회와 상해한인청년회 활동
3. 임시의정원에서의 의정활동
4.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선전활동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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