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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저널정보
도시사학회 도시연구 도시연구 : 역사·사회·문화 제13호
발행연도
2015.4
수록면
7 - 59 (53page)
DOI
10.22345/kjuh.2015.4.13.7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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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사람들을 시각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들의 욕망이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일본인들은 ‘공공의 시설’이라는 명목 하에 남산을 침탈하였다. 왜성대공원, 한양공원이 세워지고 거기에는 자신들의 종교적 시설물, 즉 신사를 건립하였다. 성벽이 훼철되면서 서울과 용산을 포괄하는 일본인들의 생활공간과 군사적 거점지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일본의 경성의 지리적 지배전략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이 중심적 공간인 남산 서북일대에 일본 식민지배의 상징인 조선신궁이 들어선다. 조선신궁의 제신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도록 선택되었고, 이토(伊東忠太) 도쿄제국대학 교수는 건축 설계자의 입장에서 예산을 고려하여 조선신궁의 위치, 건물의 배치와 양식을 설계하여 시각적 효과를 최대화하였다. 또한 일제는 1925년 조선신궁에 신을 모실 때는 각종 이벤트를 개최하며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남산은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에게 정신적 안식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는 신들의 공간이었다. 이러한 조선신궁에 한국인들은 강제로 참배해야 했다.
그 후 조선신궁이 있던 곳은 우리의 큰 치부이자 상처였다. 그러면서도 그곳은 권력의 시각적 표상이라는 공간적 공통 기억이 사람들의 뇌리에 잠재해 있었다. 남산의 회현 자락의 공간적 기능성을 장악하고자 했던 시도가 있었다. 바로 1956년 이승만 동상의 건립이다. 이승만 동상 이후 시대적 헤게모니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공간으로 남산 회현 자락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신궁이 남긴 상처에 대한 기억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 기억을 잠재우기 위해 남산에 들어선 또 다른 상징적 존재는 안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과 경성신사의 관계와 비슷한 초월성의 하이어라키를 남산에 재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승만 동상이 철거된 지 7년이 흐른 1967년 이승만 동상이 있던 근처인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후 가장 먼저 조선신궁 터의 세워질 뻔했던 김구의 동상은 1969년 남산에 들어섰다. 1975년 완공된 서울 타워(현 N서울타워)는 서울의 시각적 지형도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또한 서울에 고층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남산 회현자락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이 되며, 시각적 지배력과 기억의 유지력은 힘을 잃어 갔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남산의 공원 설치와 일본의 토지 침탈
Ⅲ. 일본의 신이 남산을 차지하다 - 조선신궁의 건립과 시각적 지배
Ⅳ. 남산, 새로운 시각적 기억을 보여주다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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