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두영 (경상국립대학교)
저널정보
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歷史와實學 第76輯
발행연도
2021.11
수록면
39 - 73 (35page)
DOI
10.31335/HPTS.2021.11.76.39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양명학이 전래되고 수용·비판되었던 명종(明宗) 말 선조(宣祖) 초는 사림세력의 집권에 따른 정치 질서의 재편이 요구·시도되던 시기였다. 그 결과 김세필(金世弼)·박상(朴祥)와 같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경우, 홍인우(洪仁祐)·남언경(南彦經)·노수신(盧守愼)과 같이 양명학을 적극적으로 이해·수용하려는 경우, 이황(李滉)과 그 문하 및 그에 동조하는 학자들과 같이 이단(異端)으로 규정·배척하는 경우, 유성룡(柳成龍)·이정구(李廷龜)처럼 양명학을 우호적으로 인식했다가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 선조(宣祖)처럼 양명학보다는 왕수인(王守仁) 개인의 공업에 주목하는 경우 등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학문적 입장에 따라 양명학에 대하여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다양한 반응이 가능했던 것은 양명학 문헌의 유포에 특별한 제약이 없었고, 심학(心學)에 대한 평가가 경직되지도 않았으며, 또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강학과 토론 등 양명학에 대한 학문적 검토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황의 양명학 변척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양명학에 대한 학계의 인식은 일변하였다. 주자학을 체계화하고 주자도통의 정립을 시도함으로써, 주자학적 정치질서를 확립시키는데 주력했던 이황은, 양명학이 주자학 정치이념을 확고하게 정립·확산시키는 데 큰 장애가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다. 이황 문하들도 이황의 입장을 계승하여 양명학을 변척했다. 그 결과 주류 학계의 일반적 입장은 점차 양명학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황과 그 문하의 변척 활동에 따라 양명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일반적인 인식으로 자리잡아 갔으며, 양명학이 거론될 때마다 이황의 변척이 그 기준이 되고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명의 조선 문묘제도 개정 요구와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 양상이었다.
선조 34년(1601) 명의 요구로 시작된 문묘개정 논의의 초점이 되었던 것은 호거인(胡居仁) 진헌장(陳獻章), 왕수인(王守仁), 설선(薛宣) 등 중국의 유현(儒賢)을 문묘에 종사하는 문제였다. 퇴계 이황의 양명학 변척에 따라 양명학은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이 학계의 공론(公論)이었고, 이는 주자의 성리학만이 정학(正學)이며, 그것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단(異端)이라는 주자도통의 관점이 그 기준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종사(從祀)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명의 영향력이 이미 사라진 시점에서도 똑같은 논의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논의가 단순한 제도 개정 문제가 아니라 이단에 대한 엄격한 비판을 통해 주자정통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이황(李滉)과 그 문하(門下)의 양명학(陽明學) 변척(辨斥)
Ⅲ. 명(明)의 왕수인(王守仁) 배향(配享) 요구와 변척론(辨斥論)의 대응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7)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22-911-000050035